황씨신문

헐크 -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영화를 보던 도중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영화가 끝나려면 아직 한 시간 이상이나 남았는데도 그냥 나와야 했다. 하지만 그러고도 남은 돈이 아깝다거나 결말이 궁금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헐크
ⓒ 2003 Universal Pictures
고무풍선이란 걸 대번에 알아챘어요. CG라는 게 너무 표난다.

실제로 이랬다는 건 아니고 아마도 이렇지 않았을까 생각한다는 것이다. 시간 때우기용, 헐크는 그런 영화였다. 보면서 얼마 전에 본 장예모 감독의 영화 <영웅>이 떠올랐는데, 두 감독 모두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너무 밝힌다는 점이 똑같고, 화면을 너무 예쁘게 만들려고 노력한 점은 알겠는데 실제로는 화면이 그렇게까지 예쁘지는 않더라는 점까지도 똑같다. 알맹이가 있어야지 알맹이가. 내용은 없고 껍데기만 예쁘게 만들면 뭐하냐고.

전체적인 구성과 내용은 평범한 데다가 흐리멍텅하고, 대사는 평범하다 못해 진부하고, 등장인물들의 성격은 평면적이다. 서로 앙숙인 로스 장군과 데이빗 배너 사이의 관계라든지, 자신 안에 내재된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브루스 배너의 고뇌, 로스 배너가 브루스에 대해 느끼는 막연하지만 깊은 두려움 그리고 반대로 그에 대한 연민, 강력한 힘에 대한 데이빗 배너의 동경,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 선명하고 확실하게 드러나는 게 없다. 그렇다고 영화가 기발함이나 상상력 아니면 무슨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 잘 포장되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여주인공
ⓒ 2003 Universal Pictures
처음부터 끝까지 이 표정 하나로 버틴다. 고민이 많은가봐.

어디 그 뿐인가. 배우들의 연기까지 싱겁기 짝이 없으니 원. 특히 베티 로스와 로스 장군은 처음부터 끝까지 심각한 표정 하나로 일관한다. 쳇, 한 시간 30분 정도는 참아줄 수 있어도 두 시간 이상이나 그런 표정을 참아야한다는 건 정말 고역이라구. 이걸 전적으로 배우 탓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건, 내가 이 영화의 원작이 되는 만화 『The Incredible Hulk』의 팬이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난 외화 <두 얼굴의 사나이>의 팬이었으니까. 그래서 바늘로 콕 찌르면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외모의 헐크가 어색하고, 수십 미터나 되는 높이를 한꺼번에 뛰어오르는 모습에서 물리학적 법칙을 따져보고, 탱크를 빙빙 돌리며 갖고 노는 헐크가 더 웃겨 보이고, 로스를 구하러 간 헐크의 표정에서 킹콩을 떠올리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용의 빈약함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 영화 <스파이더맨>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구.

남주인공
ⓒ 2003 Universal Pictures
원래 모습도 별로 순해 보이진 않지.

이 영화를 만들고 나서도 감독은 뿌듯한 생각이 들었을까? 앞으로 이안 감독의 영화를 웬만하면 피할 것 같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이 한 가지 있는데, 이 영화로 인해 외화 <두 얼굴의 사나이>에 대한 내 기억이 전혀 훼손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에 대한 칭찬은 아니다) 나에게 헐크 브루스 배너는 언제까지나 오직 한 사람, Bill Bixby 뿐이란 말씀. 평소의 선량하지만 나약한 모습, 그리고 헐크로 변했다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뒤 쓸쓸히 돌아서는 브루스 배너 박사의 뒷모습을 보면서 연민의 정을 느끼지 못하는 건 진짜 헐크가 아니다. 아, 그러고 보니 헐크로 변하기 전 마구 춤을 추던 아저씨의 눈동자가 떠오르네.

참고로 영화의 내용이 외화의 것과 달랐던 점 :

  1. 외화에서는 박사가 기혼남이었지만 영화에서는 미혼남이다.
  2. 외화에서는 헐크로 변했을 때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 영화에서는 기억을 한다.
  3. 외화에서는 헐크로 변하게 된 원인이 박사 자신에게 있지만 영화에서는 박사의 아버지에게 원인이 있다.

반대로 영화의 내용이 외화의 것과 같았던 점 :

  1. 바지는 잘 찢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배너 박사는 신축성이 좋은 바지만 입는다.

  • The Incredible Hulk, the Comics, Marble Comics, 1962
  • 두 얼굴의 사나이 (The Incredible Hulk), the TV Series, CBS, 1977-1982
  • 헐크 (The Hulk), the Movie, Universal Pictures, Marvel Entertainment,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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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5일
글 뉴트리노 neutrino
황씨신문 sulfur.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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