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씨신문

2003년 5월 8일

<빅센의 유쾌한 모험>이 특선가족만화?

* 만화인 이야기터에 올렸던 글.


오늘 이 작품을 본 사람은 드물겠지만 낮 2시에 EBS에서 '특선가족만화'라는 이름으로 '빅센의 유쾌한 모험'을 방영했습니다. 오페라를 원작으로 했다고 해서 음악에 대해 내심 기대를 하고 봤는데, 제 기준으로는 영 아니었네요. 귀에 쏙 들어오는 아리아도 합창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건 개인 취향이라고 하더라도, 이 작품이 특선가족만화라는 이름으로 방영되는 데는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말 제목에도 이의가 있습니다.

먼저 줄거리를 보자면, 원래 오페라의 내용이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이 만화영화는 줄거리가 약간은 뜬구름 잡는 것 같습니다.

엄마 여우를 따라가던 꼬마 암여우가 산지기에게 잡혀 집에서 길러지는 신세가 되고, 어느 추운 겨울날 암탉들을 선동하다가 여러 마리 죽이고는 도망칩니다. 그리고 산에서 부유한 두더지 (?) 집에 무단침입했다가 두더지에게 오줌을 갈기고는 집을 빼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집에서 쫓겨난 두더지는 술독에 빠져 지내고 있더군요.

한편 집을 빼앗아 살던 암여우는 어느 날 밤 한 멋진 숫여우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연애를 하고 이게 온 숲의 동물들에게 흉이 됩니다. 게다가 결혼도 하지 않은 암여우가 임신까지 했네요. "어떡하면 좋아요." 그래서 숫여우는 신부님 앞에서 암여우와 결혼식을 올립니다.

암여우와 숫여우 사이에서는 새끼들이 태어나고, 아직도 당신의 미모는 여전하다며 유혹하는 숫여우에게 암여우는 숲속 동물들의 눈이 있고 입방아가 요란하니 봄이 오면 또 새끼를 낳을지 결정하자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암여우는 봄이 되기 전에 밀렵꾼의 총에 맞아 죽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 나서 그 때의 그 산지기는 산에서 새끼 암여우를 발견하게 되죠. '조심하지 않으면 네 엄마처럼 널 잡을 테다.' 그러면서 인생에 대해 얘기하더군요.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뭔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정말 내용이 뭐지? 싶죠. '고모, 그게 재밌어?', '그게 재밌다고 보냐?'는 질문에 '아니, 재미는 없는데 끝이 뭔가 궁금해서.', '도대체가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서.'와 같은 궁색한 대답을 할 뿐이었습니다. 끝까지 다 보고 나서도 이게 삶은 흐르는 것이라는 주제를 얘기하고자 하는 건가 갸우뚱거릴 뿐이죠.

내용의 심오함은 주옥같은 대사에서도 나타납니다.

"첫날밤이 지나고 나서 난 일어날 수가 없었지." (산지기)

"수탉이 일하는 것 봤어요? 당신들을 착취하는 거라구요." (암여우)

"부자라고 해서 다 존경받는 건 아니지요." (암여우)

"당장 나가. 아니면 변호사를 불러서 …" (두더지)

"망측해라. 결혼도 하지 않은 암여우가 …" (숲속 동물들)

장면도 대사도 웃긴 게 아니었지만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 웃음소리를 듣고 조카는 갑자기 재미있는 게 나온 줄 알고 막 달려오더군요) 전혀 가족용 대사가 아니죠.

이 작품이 특선'가족'만화라는 이름으로 방영될만한 것이었으냐 아니냐는 내용이 선정적이고 폭력적인가 아닌가를 떠나서 아이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단 어린이든 어른이든 인내심을 갖고 한 시간 동안 이 작품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을 거라는 점은 제쳐두고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말 제목의 문제는 이렇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가 "The Cunning Little Vixen"이라고 EBS 보도자료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말로는 '빅센의 유쾌한 모험'이라고 번역을 했죠. 제목만 보면 마치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면서도 멋진 모험이 가득한 내용일 것 같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전혀 유쾌한 내용이 아닙니다.

제목에 '유쾌한'이라는 표현을 집어넣은 건 상투적인 번역이거나 눈속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흔히 작은 동물이 나오거나 하는 작품에서는 '즐거운', '신나는', '유쾌한' 등의 단어를 넣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런 뜻에서 넣었다면 내용과는 관계없이 상투적인 표현을 쓴 것이 되고, 그게 아니라면 재미없는 작품을 재미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눈속임으로 '유쾌한'이라는 단어를 넣은 것이 되죠. 정말 배신감 느껴지는 제목입니다.

그리고 '빅센'이라는 단어, 이게 또 문제입니다.

빅센, 영어로 Vixen. 제목에서는 이것이 마치 고유명사인 것처럼 썼지만 이건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vixen은 fox의 여성형, 즉 암여우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주인공 암여우에게는 '샤피어스'라는 이름이 따로 있습니다. 숲에서 만난 숫여우 '대쉬우드'에게 내 이름은 '샤피어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거든요. 게다가 작품 내에서 vixen은 '암여우'로 번역되기도 하고 '빅센'이라고 고유명사처럼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제목은 '유쾌한'이라는 단어를 집어넣는다 해도 '암여우의 유쾌한 모험'이라고 번역을 했어야 옳지 않습니까.

특별히 vixen을 '빅센'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는 곳, '암여우'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곳에서도 그렇게 번역을 하고 제목 번역도 그렇고, 이건 아무래도 성의없음의 결과로 보입니다. 만화영화를 보면서 '이건 아닌데…' 싶을 때마다 의심하게 되는 게, 혹시 이 작품은 연출자나 그 비슷한 누군가가 보고 싶어서 방영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거거든요.

'도대체 이 작품을 왜 (또는 이 시간에) 방영하는 것일까?'

수수께끼의 작품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왜 이걸 수입해서 방영했을까요?

제발 이런 작품을 '가족만화'라는 이름으로 내보내지 말기 바랍니다. 번역은 말할 것도 없고요.

끝으로 이 작품을 재미있게 봤다거나 이 작품이 '가족'만화라는 이름으로 방영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꼭 그에 대한 의견을 주셔서 제 독단에 제동을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작품이나 원작 오페라에 담겨진 심오한 내용과 뜻을 알고 있다면, 제게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을 베풀어 주십시오.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으로라도 그 한 시간을 보상받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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