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인 : 이야기터 → 성우 게시판에 올렸던 글.
오랜만에 어린이용 외화를 보고 있다. 지난주부터 EBS에서 시작한 <네버엔딩 스토리>. Michael Ende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것인데 대개의 경우 그렇듯이 원작과는 내용이 좀 다를 것이다. (소설은 읽어보지 않았다)
이야기는 12살짜리 소년 바스티안이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여의면서 시작된다. 바스티안은 이제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고 그 무렵 이상한 고서적을 취급하는 가게에서 '네버엔딩 스토리'라는 책을 빌려보게 된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책. 그 책에 푹 빠져 지내는 바스티안과 그런 바스티안을 없애기 위한 판타지아 어둠의 여왕 자이데의 음모. 가상의 세계와 이어진 현실 세계. 두 세계를 넘나드는 모험.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부류의 내용인데 나이 탓인가 이제는 예전만큼 푹 빠지지 못하는 게 아쉽다. 병들어 있는 판타지아의 어린 여왕이 애처롭게 느껴지지도 않고 주먹을 불끈 쥐고 지켜줘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으며, 어둠의 여왕 자이데의 사악함에도 전혀 치가 떨리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은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서운함을 한 방에 날려준 이가 있으니 그건 바로 블랭크 선생님이다.
자이데가 현실 세계의 바스티안을 괴롭히기 위해 보낸 블랭크 선생님은 수업 첫날 자기 소개를 하며 칠판에 이름을 쓸 때부터 심상치 않은 인상을 풍기더니, 그 임무에 매우 충실하여 사사건건 바스티안을 괴롭히고 협박하고 심지어는 리포트를 위조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 악랄함은 바스티안과 친구들 앞에서 위조된 리포트에 F를 선언할 때 최고에 달했는데, 그 순간은 정말 TV 속에 들어가 한 대 퍽 날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짠~"하는 의성어 하나에도 사악함과 얄미움이 그대로 묻어난다. 밉다, 밉다, 정말 밉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블랭크 선생님이 나올 때마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인상을 찌푸린 것 같다. "어쩌면 저럴 수 있지?" 하면서. 학교 다닐 때 특정 선생님이 날 괴롭힌 기억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선생님에 대한 학생으로서의 기본적인 적의와 반감(?)을 갖고 있어서 동질감을 느끼는가 보다.
이 블랭크 선생님 역을 맡은 성우 김환진 씨, 그 악랄하고 사악하며 너무나 못되고 얄미워서 때려주고 싶은 역을 멋지게 소화한 데 찬사와 박수를 보낸다. 덕분에 난 네버엔딩 스토리를 눈과 귀로만이 아니라 가슴으로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의 인사도 드려야겠다.
그나저나 이를 어쩌나. 블랭크 선생님의 그 연기 이후에서야 비로소 이제 빼먹지 말고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정작 블랭크 선생님은 임무에 실패한 죄로 어제 자이데의 벌을 받았으니. 설마 이대로 물러나지는 않겠지?
성우 김환진 씨, 앞으로도 늑대인간 그모르크로서 악질적인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세요!
- 짧게 쓰는 건 적성에 맞지 않나? 대여섯 줄로 끝내려고 했는데 글이 길어졌습니다.
만화영화나 라디오 드라마를 통해 성우를 만나는 것도 즐겁지만 전 역시 외화를 통해 만나는 게 가장 즐겁습니다. 이번에 그걸 다시 확인했습니다.
이 외화에 참여하는 다른 성우들의 연기도 훌륭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김환진 씨의 연기가 가장 돋보입니다. 멋진 악역이 주인공을 돋보이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이제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에게 잘 하라고 그리고 꼭 이기라고 응원할 수 있게 됐거든요. 마치 대여섯 살 먹은 아이들이 만화영화나 인형극을 보면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 것 마냥 흥분하면서 착한 편을 응원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건 다 블랭크 역을 맡은 성우 김환진 씨 덕입니다. 연기하는 게 너무 미워서 꼬옥 끌어안아 주고 싶을 정도인 걸요.
하지만 성우의 얼굴과 블랭크의 사악함이 겹치지는 건 어떻게 피할지. 차라리 성우의 실제 얼굴을 알지 못했다면 좋았을 텐데요. 이건 부작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