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씨신문

2006년 10월 16일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전 유감

EBS에서 했던 프랑스 만화영화 <빈이랑 와리>에 이런 얘기가 있었다.

유치원에 다니는 빈이가 그림 그리기 숙제를 받는다. 그런데 어떤 사정이 있어서 집에서 몰래 기르는 강아지 와리가 그린 그림을 대신 가져다 내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선생님이 그 그림을 무척 마음에 들어하셔서 빈이를 칭찬해 주고 그림을 교실 뒤에 걸어둔 것이다. 빈이는 갈등한다. 내가 그린 것도 아닌데 어떡하나 하고. 그러다가 결국 빈이는 선생님께 그 사실을 고백한다.

이걸 보면서 무척 놀랐다. 우리나라에선 나오기 힘든 얘기니까. 더군다나 유치원생 정도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만화영화라면 더더욱 그렇다.

화제를 초등학교 방학숙제로 돌려보자. 내가 어렸을 땐 방학숙제가 많았다. 우선 탐구생활을 해 가야 했고, 만들기, 그리기, 글짓기, 곤충채집, 식물채집 등등. 물론 이걸 모두 다 제대로 해 가는 일은 드물었지만.

어쨌거나 방학이 끝나고 방학숙제를 내면 선생님들이 그걸 심사해서 상을 주곤 했다. 상을 받는 애들은 대개 고정되어 있었는데, 숙제를 착실하게 해 오는 애들은 정해져 있는 데다가 만들기 같은 숙제는 재능 없이 노력만으로는 아무래도 좋은 점수를 받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숙제를 누군가가 도와준다면, 아니 조금 도와주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다 해주다시피 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대개 누군가 대신 해 준 숙제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금새 표가 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선생님이 그걸 모를 리가 있을까? 하지만 그냥 숙제를 해와서 검사만 받는 것으로 끝나면 그건 학생들 사이에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그런 거라면 선생님도 꼼꼼하게 숙제 검사를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지만 숙제에 점수를 매겨서 상을 주기라도 한다면 애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더구나 만약에 상을 받은 학생이 숙제를 스스로 한 게 아니라 누군가가 도와준 사실을, 숙제가 표가 날 만큼 뛰어났기 때문이든 어떤 다른 이유에서든 선생님도 알고 있었고, 선생님이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학생에게 상을 주었다는 걸 아이들이 알게 된다면 어떨까?

아, 난 스스로 열심히 해 왔지만 상을 못 받고 쟤는 혼자 한 게 아니라 미술을 잘 하는 엄마가 도와줬는데도 상을 받는구나. 치, 뭐 저런 게 다 있담.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갈등도 하게 될 것이다.

나도 다음 번에는 엄마한테 숙제를 해 달라고 할까? 아니야, 난 내 가치관대로 스스로 숙제를 할 거야. 아니,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해.

요즘엔 초등학생 숙제를 대신 해 주는 업체까지 있다고 하니까 이런 건 문제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나 어렸을 땐 조금은 중요한 문제였다.

여기까진 긴 서론이었고, 하고 싶은 얘기는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전 수상작에 대한 것이다. 사실 이 얘기가 처음 나왔을 때 글을 쓰려고 했다가 혹시 올해 수상작을 발표할 때쯤 주최측에서 다른 얘기가 있지 않을까 해서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수상작을 발표한 뒤에도 그에 대한 얘기가 없길래 지금에서야 글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얘기란, 바로 2004년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전 만화 부문 당선작박지홍의 「Hotel : Since 2079」에 대한 논란이다.

이 일은 지난 8월 초에 블로그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고, 내가 이 일을 알게 되었을 때는 거칠었던 논란이 있은 지 이미 며칠이 지난 뒤였다. 논란거리가 된 내용은 이렇다.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만화가 Boichi (박무직 만화가가 일본에서 쓰고 있는 필명이라 함)가 잡지 『모닝(モニング)』에 「HOTEL」을 발표했는데, 그게 2004년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전 만화 부문 당선작인 박지홍의 단편만화 「Hotel : Since 2079」와 아주 많이 비슷하단 것이었다. 그래서 Boichi가 문하생으로 추정되는 이 (둘의 그림체가 무척 비슷함)의 작품을 도용하거나 뺏은 게 아닌가 하는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도용한 게 아닌 걸로 드러났고 논란은 잠잠해졌다. 도용한 게 아니라는 근거는 2006년 4월 12일, Boichi의 누리집 (http://www.boichi.com) diary에 만화가가 올린 글이었다. 이 글은 내용으로 볼 때 『모닝(モニング)』에 「HOTEL」이 실리기 전에 쓴 것으로 보이는데, 이 글에서 Boichi 박무직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생략) ……「HOTEL」입니다. 이곳에서는 일단 콘티 (초기 버전)를 공개합니다. (주. 네임이란 말을 썼는데 일본에서는 콘티를 네임이라고도 한단다.) 원래 2004년에 한국에서 후배를 위해 쓴 스토리와 콘티였지만 한국에서는 그 (후배)가 작화를 담당해서 그의 이름으로 작은 곳에서 발표되었습니다. 만화에서 스토리 작가의 이름이 빠지는 일은 가끔 있지만 한국에서는 드물지 않습니다. (주. 의역했는데 일본보다는 많다는 뜻으로 보인다.) 하지만 제가 이후에 작화까지 했으면 하고 생각했는데, 마침 2005년에 좋은 기회가 생기는 바람에 준비해서 제 작화로 일본 독자에게 인사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공개하는 콘티는 2004년에 만든 것으로 초기 버전입니다. 새로 선보이는 작품은 더 멋있어졌습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생략)

그리고 이와 함께 박지홍의 단편만화 「Hotel : Since 2079」 2, 22, 23쪽에 해당하는 초기 버전이라는 콘티 그림을 함께 공개했다.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전 누리집에 올라와 있는 당선작과 비교해 보았는데, 공개한 콘티는 당연하게도 박지홍의 「Hotel : Since 2079」 2, 22, 23쪽과 완전히 똑같았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을 바탕으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1. 박무직 글과 콘티, 박지홍 그림으로 단편만화 「Hotel : Since 2079」를 완성한다.
  2. 2004년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전 만화 부문에 단편만화 「Hotel : Since 2079」를 박지홍 글, 그림으로 응모한다.
  3. 2004년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전 만화 부문에 「Hotel : Since 2079」가 당선작으로 뽑힌다.
  4. (아마도 2006년에) 그림을 새로 그려 박무직 (Boichi) 글, 그림으로 단편만화 「HOTEL」을 일본에서 잡지 『모닝(モニング)』에 싣는다.

그러니까 원래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작품을 한 사람 이름으로 공모전에 내서 당선됐고, 나중에 글과 콘티를 맡은 사람이 그림을 새로 그려 다른 매체에 실었단 얘기다.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건 원래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작품을 한 사람 이름으로만 공모전에 내서 당선됐다는 부분이다.

이걸 알게 됐을 때, 그러니까 지난 8월, 공모전 주최측에 전자우편으로 문의를 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당선에 문제는 없는지에 대해. 답변에서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며 확인을 해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확인해 본 결과 박지홍 씨와 박무직 씨 두 사람 사이에 공모전 전에 이미 합의가 있었으며, 공식 답변인지는 모르지만, 따라서 응모와 수상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것도 기성 만화가가 글과 콘티를 맡고, 응모자는 그림을 그려 만화를 완성한 뒤, 글과 콘티를 한 사람의 이름은 빼고 그림을 그린 사람의 이름 하나만으로 공모전에 내서 당선이 됐지만, 둘 사이에 합의가 있었으므로 응모와 수상에는 문제가 없다? 과연 그럴까?

이런 식이라면 기성 만화가가 글과 콘티를 다 짜주고 단지 그림을 잘 그리는 아마추어 만화가는 그림만 그린 뒤에 아마추어 만화가 이름 하나만으로 공모전에 응모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기성 작가가 줄거리를 다 잡고 세세한 이야기 흐름까지 다 만들어 준 뒤에 아마추어 작가는 조금 손만 본 뒤에 아마추어 작가 이름으로 공모전에 내도 된다. 게다가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마시멜로 이야기』 대리 이중 번역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리 합의를 보았으니까!

이건 저작권 문제가 아니다. 저작권자 사이에 합의가 있었고 없었고가 중요한 게 아니란 얘기다. 동아일보사와 한국과학문화재단이 주최하고 과학기술부가 후원하고 있는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전에서는 기성 작가와 신인을 구분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기성 작가라고 해서 응모할 수 없는 건 아니다. 표절만 아니면 된다. 하지만 공모전은 무엇보다도 응모자에게는 자기 이름을 알리고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이며 주최측에게는 인재를 발굴해 내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Hotel : Since 2079」, 이 작품을 만드는 데 박지홍 씨가 얼마나 많은 역할을 했는지 모르지만, 만약 박지홍 글, 그림으로 응모한 게 아니라, 박무직 글, 박지홍 그림으로 응모해서 당선되었더라면 박지홍 혼자 이름으로 당선되었을 때와는 그 평가와 명예가 달랐을 것이다. 기성 작가가 참여한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은 보는 눈이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만화라는 건 그림 못지 않게 콘티가 중요하고 SF 분야에서는 이야기 (아이디어!)가 무척 중요하다. 그런데 SF 만화에서 글과 콘티를 다른 사람이 했는데 정작 그 사람은 응모자에서 쏙 빠져 버렸다면, 그건 고갱이가 빠져버린 것과 같다. 그런 식으로 한다면 SF 분야에서 인재를 발굴하겠다는 이 공모전에 어떤 뜻이 있을까?

이 일이 알려진 지 이미 몇 달이 지났고 2006년 당선작이 발표된 지금까지도 공모전 누리집에 이에 대해 아무 얘기도 없는 걸 보면 주최측에서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굳이 기성 작가가 참여한 게 아니었더라도, 공모전에는 이런 식으로 엄연한 합동 작품을 누군가의 이름은 빼고 한 사람의 이름으로만 응모할 수는 없을 것이며, 설사 그렇게 응모했다 해도 몰랐으면 모를까 주최측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문제삼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없다.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사정이 있는 것일까? 설령 다른 사정이 있다 해도 지금으로선 그걸 모르니, 이리 생각할 수밖에 없다. 대체 주최측에서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기준과 근거는 무엇일까? 공모전 수상작에 대한 기준이란 게 원래 이런 것일까?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전에 대한 실망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과학과 기술은 정확성이 중요하고 정확성은 도덕성이 밑받침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과학기술에 대해 그리고 과학기술자에 대해 아주 엄격한 도덕성을 갖추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과학기술에 한 발 담그고 있는 SF 분야 공모전의 도덕성이 이러하다면 우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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